[51구역] 죽음의 사진작가 이동식

홍승환 기자 승인 2022.05.04 20:59 의견 0

“어린 아이들이 구로구 (현 금천구) 호압산 장택상 별장 근처에서 놀다가 발견했어. 처음엔 마네킹인 줄 알았대. 굉장히 추웠던 날이 계속돼서 우리가 현장에 갔을 땐 사체가 꽁꽁 얼어 있었어. 죽은 지 28일 만에 발견됐었지.” 이동식 ‘죽음 연출’ 사건에 대한 김원배 경찰청 수사지도관의 회고다. 그는 기자에게 “이동식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온 기자가 너무 많다”고 했다. 1983년 1월 초의 어느 날, 젊은 여인이 낙엽 더미에서 나체의 시신으로 발견됐다. 저항한 흔적이 없고, 외상도 없으며, 다른 장소에서 살해돼 운반된 흔적도 없었다.

지문을 통해 3일 만에 신원을 확인해 보니 경북 경주 출신의 김 아무개 씨(당시 24세)로 밝혀졌다. 경기도 성남 신흥동에 거주하는 희생자가 어쩌다 서울 구로구까지 와서 나신으로 죽어갔을까. 당시 사건을 맡았던 김원배 수사지도관은 우선 성남에서 서울 구로구까지 희생자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려 했으나 파악이 어려웠다. 피해자 김 씨는 미용재료상의 소개로 강동구(현 송파구) 가락동 주공아파트 내 퇴폐 이발소에 사건 전 해 11월 말에 취직, 보조 면도사로 일하던 중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12월 중순경, 잔인하게 희생된 것이었다.

경찰은 곧 피해자 주변 인물 수백 명을 대상으로 탐문수사를 시작했다. 주변 인물들은 그녀의 본명을 전혀 몰랐고, ‘진양’이라는 예명으로만 불렀다고 한다. 수사 초기에 김 수사지도관을 비롯한 수사팀은 ‘치정’ 관련 범행으로 가닥을 잡아 탐문을 벌여갔다. 김 씨의 단골 손님을 일일이 조사하던 중 자신을 사진작가로 소개한 한 단골이 그녀를 자주 찾았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사진작가의 집으로 찾아간 경찰이 “진양을 아느냐?”고 묻자, 사진작가는 태연하게 “안다. 단골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사진작가의 이름은 이동식(당시 42세). 본업은 보일러 배관공이나, 각종 공모전에서 11차례에 걸친 수상 경력을 갖고 있었고 개인전을 연 적도 있었다.

서기만 당시 수사반장이 “사진을 좀 보자”고 청하자, 그가 자신의 작품 100여 장을 내놨다. 대부분이 여성의 나체 사진으로, 칼에 찔려 피를 흘리는 모습, 목을 맨 모습, 시체를 가장한 모습을 담은 사진 등 이상하고 기괴한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했다.

수사팀이 사진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이동식이 갑자기 문갑과 벽 사이의 공간으로 사진 1장을 급히 밀어 넣는 것을 서 반장이 포착했다. 사진은 무릎까지 올라오는 갈색 부츠에 회색 치마를 입은 여자가 낙엽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얼굴은 하얀 천으로 가려져있었다. 한 마디로 ‘사체성애증’을 표현한 사진이었다.

서 반장이 사진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하자, 이동식은 “모델을 고용해 연출 사진을 찍은 것”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1장만 남아 있는 이유를 묻자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 버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숨진 김 씨의 동거남이 사진 속 옷과 갈색 부츠를 보고 “진양이 맞다”고 확인해 줬고, “단골이었고, 자신을 사진작가로 소개했다더라”는 증언을 했다. 당시 언론은 김 씨와 이동식이 애인 사이라는 보도를 일제히 내보냈으나 김 씨에게는 동거하는 남자가 있었고, 김 씨와 이동식은 만난 지 3주가량 된 사이에 불과했다. 심문과정에서 죄를 덜어보려는 이동식의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사자의 명예가 그의 거짓말로 더럽혀졌다.

체포된 이동식은 말을 바꿨다. 그는 “진양을 만난 것은 사실이나 사진을 찍고 보냈다”며 “내가 가고 난 후 여자가 자살했나 보다”라고 발뺌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또 다른 단서를 찾았다. 김 씨로 밝혀진 사진 뒷면에 적혀진 현상소를 찾아간 것. 경찰이 찾아간 현상소는 종로에 위치한 무허가 현상소였다. 현상소 직원은 이동식이 그동안 맡겼던 수상한 사진들에 대해 “범죄 현장 검증 사진인 줄 알았다”고 진술했다. 직원은 “이동식이 경찰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동식은 경북 대구 출신으로, 6세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다. 그 후 그는 숙부 집으로 보내져 초등학교를 마치고 14세 때 상경했다. 이동식은 수유리 소재 재건대(1962년 정부에 의해 조직된 넝마주이 단체)에서 15년 동안 폐지, 고철 등을 수집하며 넝마주이로 살았다. 23세 때 처음 특수절도로 전과를 얻었고, 검거 당시 전과 3범이었다. 그는 1970년대에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력도 있었다.

그가 김 수사지도관에게 자랑하듯이 보여준 열쇠고리엔 손가락 마디만한 물체가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수사팀은 그것을 보고 사람 귀라고도 했고, 낙타 눈알인 것 같다고도 했다. 김 수사지도관은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일부인 것 같았다”며 “이동식은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다”고 떠올렸다. 당시 이동식은 “이걸 지니고 있어 베트남전에서도 살아남았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뒤늦게 사진에 취미를 붙이게 된 이동식은 한 사진공모전에서 닭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입상하면서 사진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 후 유수의 공모전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면서 1982년 한국사진작가협회에 가입했고,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진을 찍는 작가’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는 일본 누드 사진집을 탐독하면서 성과 죽음의 이미지에 빠져들었다.

한편 수사팀은 이동식의 집에서 숨진 김 씨의 모습이 담긴 사진 21장을 찾아냈다. 수사팀은 처음 호압산에서 발견됐을 당시의 현장 검증 사진 속 나체 사진과 옷을 입고 천을 덮고 누워 있는 초기 압수 사진을 비교하는 새로운 기법을 채택했다.

그 결과 김 수사지도관은 “모든 사진에서 김 씨 주변의 갈대, 나뭇잎 등의 모양이 같다”며 “이동이 없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증거를 들이밀자, 이동식은 다시 말을 바꿔 “여자가 살자고 들러붙었다. 떼어내기 위해 죽였다. 소리를 질러서 입을 막아 죽였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그 직후 국과수 사체 부검 결과 희생자의 위에서 ‘청산염’이 검출됐다. 희생자가 질식사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됐다는 증거였다.

김 수사지도관에 의하면 처음 21장의 사진을 입수했을 때 그것이 희생자가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아무도 포착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급기야 사진 분석을 위해 일본에 사진을 보내 감정 의뢰를 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던 와중에 김 수사지도관이 사진작가 친구 김문환 씨와 상의했고, 결국 사진작가협회 홍순택 신구대 교수가 수사팀에 합류해 사진 분석을 시작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볼 때 당시 의사가 아닌 사진작가를 찾은 것이 특이한 점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사진전문가인 홍 교수 덕분에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홍 교수와 김문환 씨는 사진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희생자의 명지털 모양을 살폈다. 사후엔 인체의 명지털이 서서히 눕게 되는데, 희생자의 명지털 모양이 21장의 사진에서 시간 순서에 따라 제각각 달랐던 것이다. 홍 교수는 21장의 사진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했다. 그 결과 김 씨에게 청산가리를 먹여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포착한 ‘죽음 연출’ 사진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김 수사지도관은 “범행현장은 이승만 정권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별장이 있을 정도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동식의 집에서도 공업용 청산가리가 발견됐다. 보일러 기사들이 흔히 쓰는 공업용 청산가리를 범행에 쓴 것이었다.

김 수사지도관은 이동식에 대해 “전과가 있어서 경찰 다루는 법을 알더라. 고단수였다”라며 “거짓말을 끝도 없이 반복했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정신 이상자 흉내를 내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동식이 오늘날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였느냐”는 질문엔 “거짓말을 잘하는 전형적인 범죄자였다. 사이코패스는 아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이동식은 “한 인간이 죽어가는 모습, 그것은 예술이다. 나는 예술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런 것을 늘 동경해 왔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동식 사건을 담당했던 김 수사지도관은 “전율과 쾌감을 맛보기 위해 죽음을 연출한 광적인 작가의 범행”이라고 결론지은 뒤 “범죄 현장을 하나의 무대로 보고 사건을 재구성, 연극의 대본분석기법을 이용해 경찰의 살인사건 분석에 이용한 사례”라고 자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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